일제 강점기 화장(火葬) 문화의 도입 역사

 현재 대한민국에서 화장(火葬)은 대표적인 장례법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화장이 처음부터 대중에게 거리낌 없이 다가 온 것은 아니었다. 통일 신라, 고려의 천년이 넘는 기간동안 국교가 불교였음을 생각하면 민중들에게 자연스럽게 녹아있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현실은 화장법이 포함된 '묘지규칙'이 3.1운동의 원인으로 꼽힐 정도로 화장에 대한 대중의 거부감은 심각했다.(정확히는 공동묘지..)
 그 원인은 조선왕조 들어 국가의 이념이 유교로 확정되고 국가적 차원에서 화장을 엄금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헌사에서 상언(上言)하였다. "지금부터 현직 관리와 산관(散官)을 막론하고 〈부모의〉 삼년상을 마치게 하고, 가묘(家廟)의 제도를 밝히며, 삼일장(三日葬)과 화장(火葬)을 금하되, 모두 석 달 또는 달을 넘겨서 장사지내는 제도를 행하게 하소서." 사사(使司)에 내려보내어 논의해서 아뢰게 하였다.
태조실록 7권, 태조 4년 6월 28일 경인 3번째기사 
 조선 왕조에서 화장에 대한 최초의 논의는 건국 초인 태조 시기부터 등장한다. 삼년상은 패시브로 행하게 하고 화장을 금지하는 제도를 만들자는 건의가 나온것을 보면 역시 조선 초에는 불교의 잔재라던가 유교적 관습의 정착이 더디었던 것으로 보인다.
 홍무 21년 사헌부의 수판(受判)인데, 장사[葬]한다는 것은 사람 시체를 갈무려[藏] 준다는 것이니, 그 해골을 감추어 밖에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이어늘, 요즈음에 불교도의 화장법이 성행하게 되어, 사람이 죽으면 들어다가 뜨거운 불속에 넣어서 모발이 타고 살이 타 녹아 없어지게 하고 다만 해골만 남게 한다. 심한 자는 해골도 태워서 그 재를 뿌려 물고기나 날짐승에게 주고 말하기를, ‘반드시 이와 같이 한 뒤에야 극락에 가서 다시 태어날 수 있고 서방정토(西方淨土)에 갈 수 있다.’ 한다. 이 말이 한 번 일어나게 되면서 사대부(士大夫)의 고명하다는 사람도 모두 거기에 혹하여 땅에 장사하지 아니한 자가 많게 되었다. 아아, 참 심히 어질지 못한 일이다. 사람의 정신이란 유행되고 화통(和通)하여, 죽어서나 살아서나 사람이건 귀신이건 근본은 동일한 기맥인 것이다. 조부모가 지하에서 편하게 있으면 자손도 또한 편하게 되는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이와 반대일 것이요, 또는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나무가 땅에 뿌리를 의탁한 것과 같아서, 그 뿌리와 본신을 불사르면 지엽이 말라 시들어질 것이니, 어찌 잎이 피고 가지가 자랄 수가 있겠는가. 이것은 어리석은 남녀들도 다 같이 아는 바이다. 성인께서 세 치[寸]의 관(棺)에 다섯 치 곽(槨)으로 마련하면서도 오히려 속히 썩을까 염려하며, 염(歛)하는 옷이 수십 벌이면서도 그래도 박한 것이 아닐까 두려워하였으며, 또 관속에 곡식을 넣으면 혹시 벌레나 개미가 침입할까 염려하였던 것이다. 송종(送終)하는 예절이 이와 같거늘, 도리어 변방 되놈의 아비 없는 가르침을 사용하려는 것이 인(仁)한 일이라 이르겠는가. 원컨대, 지금부터는 일체 화장을 금하고 이 법을 범한 자는 죄를 주게 하고, 지방의 인민들은 부모의 장삿날에 이웃 마을 사람과 향도(香徒) 들을 모아놓고 술 마시고 노래 불러 조금도 애통한 마음이 없는 것 같으니, 예로서 풍속을 이룩하는데 누(累)가 되는 것이 말할 수 없으니, 역시 모두 엄금하라 하였고,
세종실록 10권, 세종 2년 11월 7일 신미 3번째기사
 세종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화장은 존속하고 있던것으로 보여지는데 사대부들 조차 '땅에 장사시내지 아니한 자가 많게 되었다'라는 언급을 보니 이 시기 까지도 화장이 우리에게 비교적 익숙한 장례법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지금 전교(傳敎)를 들으니, ‘윤대(輪對)하는 자의 말이, 「요즈음 우민(愚民)들이 혹은 요승(妖僧)들에게 유혹(誘惑)을 당하고, 혹은 장사(葬事) 비용을 아껴서 어버이의 시체(屍體)를 불로 화장을 하며, 심한 자는 자신(自身)의 질병(疾病)을 가지고 죽은 자의 빌미[祟] 때문이라 하여 심지어는 무덤을 파내어 시체를 태워버리는 자까지 있으니, 풍속과 교화가 이렇게 퇴폐되었습니다. 바라건대 엄격하게 금지시키게 하소서.」 하는데, 그 금지하는 규정을 천명하여 풍속을 근절시키라.’ 하였습니다. 신(臣) 등은 그러한 그 말씀에 따라 《대명률(大明律)》을 참고하니 상장조(喪葬條)에는, ‘존장(尊長)의 유언(遺言)을 따라 시체를 화장(火葬)한 자는 장(杖) 1백 대에 처한다.’ 하였으며, 발총조(發塚條)에는, ‘만약 시마(緦麻) 이상의 존장의 시체를 훼기(毁棄)하는 자와 자손(子孫)으로서 조부모(祖父母)나 부모(父母)의 시체를 훼기하는 자는 참형(斬刑)에 처한다.’ 하였습니다. 요즈음 무식한 무리들이 혹은 삿된 말에 현혹되고, 혹은 재물을 아껴서 부모의 시체를 불속에 넣어서 시체를 훼손시키고 있으니, 이것은 사람으로서 차마 못할 일입니다. 지금 이후로는 만일 그러한 행위를 하는 자가 있으면 바라건대 법에 따라 논단(論斷)하게 하시고 그를 유도한 자도 같은 죄로 다스리며, 이를 검거하지 못한 관리와 관령(管領)·이정(里正)과 가까운 이웃까지도 중론(重論)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성종실록 41권, 성종 5년 4월 25일 기묘 3번째기사 
 하지만 성종대에 이르러 화장은 국법으로 금지되게 된다. 대명률을 들먹이며 곤장 1백대는 기본에 참형까지 언급하고 그걸 내버려둔 이웃까지 벌을 주겠다 하는데 어떤 간큰 사람이 화장을 할 수 있었을까. 조선 조에 들어 시행된 화장 억압 정책은 빛을 발하여 조선말 근대의 한반도에서 화장이라는 것은 전혀 일반적이지 않은 장례법이 되었다. 참고로 조선에서 화장을 하는 경우는 ①높이 평가받은 승려가 죽었을 때 ②악질로 죽었을 때 ③나쁜 일이 많이 생겨서 죽은 부모와의 관계를 끊으려고 할때 ④전쟁으로 인해서 죽었을 때 의 네가지로 국한 되었는데 종교적 이유가 아니라면 흉한 죽음이 발생했을 때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황성신문 1910.6.28 墳墓觀念及迷信(분묘관념급미신)에 就(취)하야
이미지 출처:독립기념관 원문정보-신문자료


 1910년 대한제국이 끝장날 무렵 황성신문의 기사는 당대인들의 화장에 대한 인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대략적으로 해석을 해보자면 원래 우리나라에도 화장법이 있었는데 이건 머리밀고 염불외는 중이나 제사지내줄 사람 없는 사람을 위해 친척중에서 착한 사람이 해주는 것이고, 일반적인 집안에서는 경시하는 방법이었다 라는 것.
 그러던 것이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에 병합되고, 조선총독부에 의해 1912년 6월 20일 <墓地火葬場埋葬及火葬取締規則(묘지화장장매장급화장취체규칙)>-이하 <묘지규칙>-이 발포되어 화장의 합법화가 이루어지면서 변화하게 되었다. 총 24개의 조항으로 구성된 <묘지규칙>은 공동묘지를 만들어 전국에 산재한 한국인의 묘지를 통제 및 제한하고, 이전까지 금지되었던 화장을 합법적인 장법으로 인정하는 것이 그 주요 골자였다. 

시대일보 1924. 10. 10, “무칠 곳이 업게 될 死者 해마다 八千餘名”.
이미지출처: 한국언론진흥재단-고신문

 <묘지규칙>으로 화장이 합법화가 되었다고 한들 여전히 조선인들은 화장을 기피하였는데 1924년 10월 10일 시대일보 기사에 따르면 경성에서의 화장수 2,485 건 중 조선인의 수 707건은 대부분 사고무친이거나 가난하여 산소를 쓸 여력이 없는 사람들로 경제적 이유에 의해 어쩔수 없이 화장을 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화장의 합법화를 통해 점차 많은 수의 조선인들이 화장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정일영 (2013). 일제시기 장묘제도 변화의 의미. 역사연구, (25), p78

 1915년 4.6%였던 경성부 조선인의 화장률은 1927년이 되면 25%까지 증가하게 되는데 1935년이 되면 무려 76%까지 증가하게된다. (1935년과 36년의 차이는 동시기 경성부의 확대에 따른 결과라고 한다.) 경성부에 국한 되어 있긴 하지만 대한민국의 화장률이 74%에 도달한 것이 2012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일제 강점기 <묘지규칙>이 한반도의 장례 문화에 끼친 영향이 적지않았을 거란 추측이 가능하다.
 참고로 <묘지규칙>을 반포하며 일제가 주장했고, 그에 동조했던 지식인들이 내세웠던 근거는 '위생'이었는데 오늘날 화장의 증가 추세에 '위생적'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생각해볼만한 문제. [집중취재]“화장 원한다, 화장장 싫다”



 참고문헌:
 다카무라 료헤이 (2000). 공동묘지를 통해서 본 식민지시대 서울. 서울학연구, (15), 131-165.
 한만수 (2010). 「만세전」과 공동묘지령, 선산과 북망산. 한국문학연구, 39, 95-137.
 정일영 (2013). 일제시기 장묘제도 변화의 의미. 역사연구, (25), 73-114.

덧글

댓글 입력 영역


애드센스